1919년 평택·안성의 ‘만세운동’
1919년 평택·안성의 ‘만세운동’
by 마이빌평택 2018.03.02
3월 9일 최초 시위…한 달간 수만 명 시위
안성시 원곡면 만세고개에 있는 안성 3·1운동기념관 내부 모습.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여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이다. 이날 민족 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고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만세 운동은 전국과 해외로 확산됐으나 일본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실패했다.
◆평택의 3·1운동
평택지역은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인 데다 서울과 거리가 가까워 다른 농촌 지역보다 이른 시기인 3월 9일부터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초기 천도교인 중심으로 전개_ 최초 시위는 3월 9일에 다수의 천도교인이 살던 현덕면 권관리·기산리·도대리에서 시작된다.
11일에는 평택 장날에 시위가 일어난다. 주도한 사람들은 비전리에 살았던 이도상과 목준상, 합정동(리)의 심현섭, 고덕면 양교리의 한영수였다.
21일에는 북면(진위면) 야막리와 봉남리의 천도교인과 주민 500여 명이 박창훈을 중심으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31일에는 봉남리에서 박성백·최구홍 등의 주도로 400여 명의 주민이 진위군청 앞과 경찰서 앞까지 진출하여 만세시위를 한다.
평택역 광장에서 만세시위_ 4월 1일 밤 9시를 전후하여 평택역 광장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됐으며 팽성읍·고덕면·오성면·현덕면에서는 주민들이 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며 연대시위를 한다. 같은 날 북면(진위면) 은산리 농민 정재운·정경순·정문학은 마을 뒷산에 올라가 주민을 선동하고, 봉남리까지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한다.
9일에는 고덕면·북면·읍내면·오성면·현덕면 등지의 주민이 1번 국도를 따라 평택으로 진출을 시도하며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했고 10일에는 서탄면 금암리·사리·수월암리에서 만세를 부르고 주재소를 습격한다.
◆안성의 3·1운동
안성의 3·1운동은 읍내면·죽산면·양성면 등 3개의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1914년 일제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 안성은 3개 군으로 나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사회·경제·정서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이었다. 따라서 3개 지역이 각자 독자적인 형태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읍내면(안성 1·2·3동)의 3·1운동_ 읍내면에서는 3월 11일 최초의 시위가 있었다. 3월 30일에는 동리·서리·장기리에서 500~6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에서 시위를 벌이다 군청으로 몰려간다.
3월 31일과 4월 1일 이틀간 군중 3500여 명이 결집해 군청과 면사무소를 습격·파괴했다. 이때 일본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죽산면의 3·1운동_ 죽산면에서는 4월 1일에 죽산공립학교 학생들의 시위와 두현리·장계리 주민의 시위가 있었다. 절정은 다음날 있었던 죽산시장 시위. 장원리·장계리·죽산리·매산리 주민 2000여 명이 참가했으며 태극기가 최초로 등장한다.
일죽면에서는 4월 2일 장암리·주천리 주민 300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삼죽면은 3일 주민 300여 명이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시위를 벌인다.
원곡·양성면의 3·1운동_ 양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마을 주민이 참가한 가운데 비교적 이른 3월 11일~4월 1일 시위가 전개된다. 시위에 참가한 마을은 덕봉리·산정리·도곡리·석화리·구장리·명목리 등. 각 마을에서 모인 주민들은 원당현(만세고개)을 넘어온 원곡·칠곡의 시위대를 만나 무력시위를 벌인다.
주동자 이덕순의 주도로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됐으며 처음부터 무력으로 일제와 일본인을 몰아내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목적의식이 분명했다.
그러나 일본 군대가 진압에 나서 4월 2일부터 6월 초까지 361명이 검거되고 이 중 127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24명이 순국한다.
마이빌평택 정정화 기자 laputa007@naver.com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여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이다. 이날 민족 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고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만세 운동은 전국과 해외로 확산됐으나 일본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실패했다.
◆평택의 3·1운동
평택지역은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인 데다 서울과 거리가 가까워 다른 농촌 지역보다 이른 시기인 3월 9일부터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초기 천도교인 중심으로 전개_ 최초 시위는 3월 9일에 다수의 천도교인이 살던 현덕면 권관리·기산리·도대리에서 시작된다.
11일에는 평택 장날에 시위가 일어난다. 주도한 사람들은 비전리에 살았던 이도상과 목준상, 합정동(리)의 심현섭, 고덕면 양교리의 한영수였다.
21일에는 북면(진위면) 야막리와 봉남리의 천도교인과 주민 500여 명이 박창훈을 중심으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31일에는 봉남리에서 박성백·최구홍 등의 주도로 400여 명의 주민이 진위군청 앞과 경찰서 앞까지 진출하여 만세시위를 한다.
평택역 광장에서 만세시위_ 4월 1일 밤 9시를 전후하여 평택역 광장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됐으며 팽성읍·고덕면·오성면·현덕면에서는 주민들이 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며 연대시위를 한다. 같은 날 북면(진위면) 은산리 농민 정재운·정경순·정문학은 마을 뒷산에 올라가 주민을 선동하고, 봉남리까지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한다.
9일에는 고덕면·북면·읍내면·오성면·현덕면 등지의 주민이 1번 국도를 따라 평택으로 진출을 시도하며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했고 10일에는 서탄면 금암리·사리·수월암리에서 만세를 부르고 주재소를 습격한다.
◆안성의 3·1운동
안성의 3·1운동은 읍내면·죽산면·양성면 등 3개의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1914년 일제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 안성은 3개 군으로 나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사회·경제·정서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이었다. 따라서 3개 지역이 각자 독자적인 형태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읍내면(안성 1·2·3동)의 3·1운동_ 읍내면에서는 3월 11일 최초의 시위가 있었다. 3월 30일에는 동리·서리·장기리에서 500~6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에서 시위를 벌이다 군청으로 몰려간다.
3월 31일과 4월 1일 이틀간 군중 3500여 명이 결집해 군청과 면사무소를 습격·파괴했다. 이때 일본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죽산면의 3·1운동_ 죽산면에서는 4월 1일에 죽산공립학교 학생들의 시위와 두현리·장계리 주민의 시위가 있었다. 절정은 다음날 있었던 죽산시장 시위. 장원리·장계리·죽산리·매산리 주민 2000여 명이 참가했으며 태극기가 최초로 등장한다.
일죽면에서는 4월 2일 장암리·주천리 주민 300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삼죽면은 3일 주민 300여 명이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시위를 벌인다.
원곡·양성면의 3·1운동_ 양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마을 주민이 참가한 가운데 비교적 이른 3월 11일~4월 1일 시위가 전개된다. 시위에 참가한 마을은 덕봉리·산정리·도곡리·석화리·구장리·명목리 등. 각 마을에서 모인 주민들은 원당현(만세고개)을 넘어온 원곡·칠곡의 시위대를 만나 무력시위를 벌인다.
주동자 이덕순의 주도로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됐으며 처음부터 무력으로 일제와 일본인을 몰아내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목적의식이 분명했다.
그러나 일본 군대가 진압에 나서 4월 2일부터 6월 초까지 361명이 검거되고 이 중 127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24명이 순국한다.
마이빌평택 정정화 기자 laputa007@naver.com